(칼럼 유성옥)함박눈이 퍼붓는다.

편집부 | 입력 : 2018/12/22 [14:43]

▲ 유성옥 dk 본부장

눈이 내린다. 잊어버린 젊은 날의 이야기, 오래전에 가버린 그 겨울 어느 날처럼, 함박눈이 퍼붓는다. 어느 해 겨울이던가. 이렇게 함박눈이 퍼붓는 날이었다. 폭설이 내려 차가 끊겨버린 바람에, 40여리 산길을 걸어가다. 잠시 한 잔 술로 추위에 언 몸이나 녹이고 가자하고, 늘 오며가며 들리는 산골짜기 입구에 자리한 단골 대폿집에 들렸었다. 정확히 말하면 전문 술집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설악산에 골짜기들이 서로 만나는 산골짜기 초입에 있는 허름한 대폿집 이었다. 막걸리와 소주를 받아놓고, 가끔 술을 사려오는 산골마을 사람들을 상대로 병술을 파는, 흔히 시골동네 어귀에서 보던 허름한 가게였다. 이렇게 눈이 퍼붓는 날, 뭔 일이냐고 반갑다 하면서, 오늘은 이래저래 다 글렀으니, 문 닫고 같이 술이나 마시자는 젊은 아주머니의 기분 좋은 제안을 받고, 그녀만의 공간인 따뜻한 아랫목에 앉아서, 둘이 서로 시시콜콜 속 창시 없는 이야기들을 안주로, 주거니 받거니 막걸리를 마시다보니, 어느새 해가 저물고 밤이 깊어버렸다.

 

지금 다시 생각해 봐도 20대 중반인 나와 40대인 그녀와 무슨 재미나는 이야기들이 많았을까마는, 산골마을 아낙네들 사이에, 사내들의 간을 빼먹고 사는 불여우라고 하였다. 소문답게, 나름 농익은 그녀의 미모에 취하고, 주고받는 술에 취하다보니, 시답잖은 이야기도 재미가 있었고, 시간이 가는 줄을 몰랐었다. 밤이 늦었다며 일어서려다, 이렇게 눈이 퍼붓는데 가면 죽는다고, 가다가 길에서 얼어 죽는다며, 한사코 말리는 그녀의 손을 뿌리지지 못하고, 다시 주저앉아 기어이 막걸리 동이를 바닥을 내고나서 끝이 났다.

 

그리고 그녀가 깔아준 따뜻한 요위에서 아름답고 향기로운 꿈같은 잠을 잤었다. 부연하면, 괜히 쓸데없는 오해들 마시라. 믿거나 말거나 하는 말이지만 말이다. 그날 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그녀가 덮어준 이불속에서 편히 자라고 내밀어준 그녀의 왼손만 잡고 잤었는데, 솔직히 말해서 지금 함박눈이 퍼붓던 그날 밤을 돌이켜보면, 내가 순진한 것이 아니고 등신이었다는 생각이다. 창가에 앉아 퍼붓는 함박눈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오래전에 가버린 그 겨울 어느 날 밤을 함께 보냈던 그녀가 생각이 난다.

 

웃을 때면 붉지도 않고 엷지도 않은 아름다운 입술 사이로 흰빛 막걸리보다 더 하얗게 빛나던 그녀의 치아가 보이고, 어설프고 시답잖은 내 이야기들을 재미있다며 맞장구를 쳐주던 그녀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어느 해던가? 우연히 차를 타고 그 깊은 골짜기를 지나는 길이 있어, 그녀의 소식을 수소문해본 적이 있었는데, 그녀가 살던 외지고 허름한 대폿집 자리에는 화려한 모텔이 들어서 있고, 그녀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다.

 

아무에게도 털어놓지 못할,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아픈, 차마 입 밖에 내지 못할 알 수 없는 아픈 과거가 있다는 것을, 이따금 오가며 만날 때마다 그녀가 간간이 내쉬는 깊은 한숨을 통해서 짐작할 뿐, 누군가로부터 위로를 받는 것조차도 두려워했던 그녀 이었던 것 같다. 사실은 당시 산골짜기에 떠돌던 소문에 의하면, 미모의 그녀는 젊은 남편을 월남에서 잃었는데, 시댁에서 여자가 잘못 들어온 탓이라며 하나뿐인 애까지 빼앗기고 쫓겨났다고 들었다.

 

필자는 그녀가 상처를 견뎌내기 힘이 들면 나에게 말할 것이라 믿고 기다렸을 뿐, 한 번도 그녀에게 과거를 물어보지 않았다. 지금 그녀는 살아있을까, 살아있다면 함박눈이 퍼붓던 그날 밤은 기억하지는 못해도, 그날 밤 그녀가 취기를 빌어 소원했던 것처럼, 진실로 사랑하는 누군가의 어깨에 기대어 행복한 꿈을 꾸고 있는 여인이기를 바라면서, 그날 밤 술에 얼큰히 취한 그녀가 손가락으로 술상을 두드리며 가만히 눈물로 불렀던 노래, 기러기 아빠를 함박눈이 퍼붓는 날의 아픈 기억으로 듣는다.

  • 도배방지 이미지

경북영상뉴스
구미 시정 뉴스
많이 본 뉴스